2016년 벌써 3월이 지나가고 있네요.  포럼 문화와도서관 토요독서회(일명 토독회) 3월 모임 후기를 공유 합니다. 단순히 책을 쌓아 놓은 공간이 아니라 개인의 철학과 의지를 담아내고자 했던 조선 후기 당대 지식인들의 서재의 명칭에 얽힌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 책입니다. 이번 후기는 송경진 박사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토독회에서는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을 바탕으로 올한해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볼려고 합니다. 다음달쯤 대략적인 윤곽이 그려질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그때 다시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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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살다: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박철상 저, 문학동네)

송 경 진

이 책은 저자가 국회도서관보 <서재이야기> 코너에 2008년 5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연재했던 글 중 일부를 추려 엮은 것으로, 정조 이후 인물 24명의 서재이름과 그 서재를 짓는데 얽힌 이야기 등을 통해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삶과 사상 등을 조명해보고자 하였다.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언론보도 등에 나타난 저자의 이력은 특이하다. 수출입업무를 담당하는 은행원이면서 재야의 고문헌 연구자가 저자의 현재 모습이다. 한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고문헌 연구에 매진해 온 저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완당평전'에 숨어 있는 오류를 지적한 글로 학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었다.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글 읽는 선비들, 혹은 그 가문이랄 수 있는 사족(士族)들이 학문과 정치를 담당했던 국가이다. 그런 만큼 책은 모든 지식인과 행정가들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도구였지만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에도 좀처럼 쉽게 구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상업출판이 성행했던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경비와 노력이 들어가는 출판을 나라에서 관장했기 때문에 개인이 책을 입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책을 구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임금으로부터 책을 내려 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책을 내사본(內賜本)이라고 하는데 이런 책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란 높은 관직에 있거나 좋은 가문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고위직도 아니었고, 화려한 가문의 일원도 아니었음에도 정조의 총애로 누구보다 많은 내사본을 수장했던 유득공 같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오죽하면 그는 그의 서재에 ‘사서루(賜書樓)’라는 현액을 걸었을까? 그런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보다보면 예전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책을 소장할 서재를 갖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으며, 그 꿈이 이루어지면 자신의 좌우명과 같은 글귀를 담은 서재의 이름을 지어 좋은 글씨를 받아 현액을 걸고, 그 서재가 지어진 내력을 기록한 글인 기문을 남겼던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24개의 서재이름은 모두 그들의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임금의 서재부터 가난한 시인의 서재까지 그들의 삶과 삶이 만들어 낸 철학이 배어있다. 몇몇 기억에 남는 서재를 소개한다.

임금의 서재인 정조의 홍재(弘齋)는 글자로는 ‘큰 서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서명응이 지은 홍재기(弘齋記)에서 보듯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경계로 삼은 것이다. 호학의 개혁군주로서 큰 그림을 그리고 나라를 운영하고자 했던 정조에게 어울리는 서재이름이 아닐까? 이 책에 소개된 바로는 드라마로 잘 알려진 정조의 이름 ‘이산(李祘)’은 사실 ‘이성’으로 읽어야 한단다. 정조가 스스로 본인의 이름을 ‘이성’으로 부를 것을 알린 기록이 있다니 앞으로는 ‘정조 이산’이 아니라 ‘정조 이성’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여항시인이었던 장흔은 평생 작은 집 하나를 짓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말년에 들어서야 열 칸 남짓한 초당을 지었는데 그 집의 서재에 ‘이이엄(而已广)이란 편액을 걸었다. 가난한 시인의 작은 초당에 무슨 책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책의 저자는 엄(广)자처럼 속이 텅 빈 서재였으리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장흔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지식인이 사회적 책임을 버릴 수는 없다고 여겼으며, 그런 사람은 지식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서재는 비었으나 기개와 의지는 빈 서재를 채우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천재라는 찬사를 들으며 출세가도를 달리다 천주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발각되어 긴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정약용의 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글자의 뜻만으로는 그 의미를 심각하게 이해할 까닭이 없어보이지만 사실 이 호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여(與)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하고 유(猶)가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구절에서 왔단다. 여(與)는 큰 코끼리를 가리키고, 유(猶) 또한 주위를 살펴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동물을 이르는 말이라니 천주교 박해의 세월 속에 어떤 꼬투리라도 잡히지 않으려 노심초사했을 정약용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여 애처롭기조차 하다.

30년 가까이 서재를 꾸민 역관도 있고, 왕의 서재에 버금가는 4만권의 서적을 구비했던 경화세족의 서재도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서재는 산 속에 산방 하나를 깨끗이 지어놓고 ‘일속(一粟)’이란 이름을 붙였던 황상의 ‘일속산방(一粟山房)’과 이상적의 ‘해린서옥(海隣書屋)’, 그리고 이 책을 쓴 저자의 서재인 ‘수경실(修綆室)’이다.

일속산방은 ‘좁쌀만한 집’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의 방에는 온갖 도서와 제자백가의 책들이 수북하고 벽에는 세계지도조차 걸려 있어서 마치 부처가 말한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는다’는 말처럼 온 세상이 다 들어있었다.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의 문인들과 친교가 두터웠는데 그 중에서 특히 가까웠던 문인이 ‘해내존지기, 천애약비린(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이란 두 구절을 도장에 새겨 선물했다. 이 구절은 당나라 시인이 친구를 임지로 떠나보내며 지은 시의 일부로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있으니, 하늘 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웃에 있는 듯 하네”라는 의미다. 이 구절에서 가져온 두 글자가 그의 서재 이름이 되었다. 한편,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서재에 ‘수경실’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는 당나라 시인 한유의 시구절인 ‘급고득수경(汲古得修綆)’에서 얻어왔다.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면 두레박줄이 길어야 하듯이 옛사람의 학문을 탐구하여 훌륭한 학자가 되려면 항심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해야 함을 경계한 말이다.

끝으로 어쩌다보니 책모임의 구성원들이 모두 공부에 뜻을 둔 사람들이라 그랬는지 모두 한마음으로 위로 받았다고 고백한 책의 한 대목이 있었다. 다산이 유배 중에 가르친 황상이라는 제자(일속산방이란 서재의 주인이다)가 자신은 둔하고, 박하고, 미욱하여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니 다산이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큰 문제점이 있는데, 네게는 이런 것이 없구나. 첫째는 외우기를 잘하는 것인데,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소홀히 하는 데 있다. 둘째는 글을 잘 짓는 것인데,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경박한 데 있다. 셋째는 이해력이 뛰어난 것인데,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거친 데 있다. 대개 둔하지만 악착같이 파고드는 사람은 그 구멍을 넓힐 수 있고, 막혀 있지만 소통이 된 사람은 그 흐름이 거침없어지며, 미욱하지만 연마를 잘한 사람은 그 빛이 반짝거리게 되는 것이다. 파고드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막힌 것은 어떻게 뚫어야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연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부지런해지느냐? 마음을 꽉 잡아야 하는 것이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는 구전 격언(?)만큼이나 그냥 믿고 싶은 대목이다. 세상 다른 일들도 공부하듯 ‘부지런’하면 ‘되는’ 일들이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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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포럼문화와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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