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벌써 3월이 지나가고 있네요.  포럼 문화와도서관 토요독서회(일명 토독회) 3월 모임 후기를 공유 합니다. 단순히 책을 쌓아 놓은 공간이 아니라 개인의 철학과 의지를 담아내고자 했던 조선 후기 당대 지식인들의 서재의 명칭에 얽힌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 책입니다. 이번 후기는 송경진 박사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토독회에서는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을 바탕으로 올한해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볼려고 합니다. 다음달쯤 대략적인 윤곽이 그려질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그때 다시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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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살다: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박철상 저, 문학동네)

송 경 진

이 책은 저자가 국회도서관보 <서재이야기> 코너에 2008년 5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연재했던 글 중 일부를 추려 엮은 것으로, 정조 이후 인물 24명의 서재이름과 그 서재를 짓는데 얽힌 이야기 등을 통해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삶과 사상 등을 조명해보고자 하였다.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언론보도 등에 나타난 저자의 이력은 특이하다. 수출입업무를 담당하는 은행원이면서 재야의 고문헌 연구자가 저자의 현재 모습이다. 한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고문헌 연구에 매진해 온 저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완당평전'에 숨어 있는 오류를 지적한 글로 학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었다.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글 읽는 선비들, 혹은 그 가문이랄 수 있는 사족(士族)들이 학문과 정치를 담당했던 국가이다. 그런 만큼 책은 모든 지식인과 행정가들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도구였지만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에도 좀처럼 쉽게 구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상업출판이 성행했던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경비와 노력이 들어가는 출판을 나라에서 관장했기 때문에 개인이 책을 입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책을 구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임금으로부터 책을 내려 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책을 내사본(內賜本)이라고 하는데 이런 책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란 높은 관직에 있거나 좋은 가문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고위직도 아니었고, 화려한 가문의 일원도 아니었음에도 정조의 총애로 누구보다 많은 내사본을 수장했던 유득공 같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오죽하면 그는 그의 서재에 ‘사서루(賜書樓)’라는 현액을 걸었을까? 그런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보다보면 예전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책을 소장할 서재를 갖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으며, 그 꿈이 이루어지면 자신의 좌우명과 같은 글귀를 담은 서재의 이름을 지어 좋은 글씨를 받아 현액을 걸고, 그 서재가 지어진 내력을 기록한 글인 기문을 남겼던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24개의 서재이름은 모두 그들의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임금의 서재부터 가난한 시인의 서재까지 그들의 삶과 삶이 만들어 낸 철학이 배어있다. 몇몇 기억에 남는 서재를 소개한다.

임금의 서재인 정조의 홍재(弘齋)는 글자로는 ‘큰 서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서명응이 지은 홍재기(弘齋記)에서 보듯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경계로 삼은 것이다. 호학의 개혁군주로서 큰 그림을 그리고 나라를 운영하고자 했던 정조에게 어울리는 서재이름이 아닐까? 이 책에 소개된 바로는 드라마로 잘 알려진 정조의 이름 ‘이산(李祘)’은 사실 ‘이성’으로 읽어야 한단다. 정조가 스스로 본인의 이름을 ‘이성’으로 부를 것을 알린 기록이 있다니 앞으로는 ‘정조 이산’이 아니라 ‘정조 이성’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여항시인이었던 장흔은 평생 작은 집 하나를 짓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말년에 들어서야 열 칸 남짓한 초당을 지었는데 그 집의 서재에 ‘이이엄(而已广)이란 편액을 걸었다. 가난한 시인의 작은 초당에 무슨 책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책의 저자는 엄(广)자처럼 속이 텅 빈 서재였으리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장흔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지식인이 사회적 책임을 버릴 수는 없다고 여겼으며, 그런 사람은 지식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서재는 비었으나 기개와 의지는 빈 서재를 채우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천재라는 찬사를 들으며 출세가도를 달리다 천주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발각되어 긴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정약용의 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글자의 뜻만으로는 그 의미를 심각하게 이해할 까닭이 없어보이지만 사실 이 호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여(與)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하고 유(猶)가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구절에서 왔단다. 여(與)는 큰 코끼리를 가리키고, 유(猶) 또한 주위를 살펴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동물을 이르는 말이라니 천주교 박해의 세월 속에 어떤 꼬투리라도 잡히지 않으려 노심초사했을 정약용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여 애처롭기조차 하다.

30년 가까이 서재를 꾸민 역관도 있고, 왕의 서재에 버금가는 4만권의 서적을 구비했던 경화세족의 서재도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서재는 산 속에 산방 하나를 깨끗이 지어놓고 ‘일속(一粟)’이란 이름을 붙였던 황상의 ‘일속산방(一粟山房)’과 이상적의 ‘해린서옥(海隣書屋)’, 그리고 이 책을 쓴 저자의 서재인 ‘수경실(修綆室)’이다.

일속산방은 ‘좁쌀만한 집’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의 방에는 온갖 도서와 제자백가의 책들이 수북하고 벽에는 세계지도조차 걸려 있어서 마치 부처가 말한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는다’는 말처럼 온 세상이 다 들어있었다.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의 문인들과 친교가 두터웠는데 그 중에서 특히 가까웠던 문인이 ‘해내존지기, 천애약비린(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이란 두 구절을 도장에 새겨 선물했다. 이 구절은 당나라 시인이 친구를 임지로 떠나보내며 지은 시의 일부로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있으니, 하늘 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웃에 있는 듯 하네”라는 의미다. 이 구절에서 가져온 두 글자가 그의 서재 이름이 되었다. 한편,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서재에 ‘수경실’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는 당나라 시인 한유의 시구절인 ‘급고득수경(汲古得修綆)’에서 얻어왔다.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면 두레박줄이 길어야 하듯이 옛사람의 학문을 탐구하여 훌륭한 학자가 되려면 항심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해야 함을 경계한 말이다.

끝으로 어쩌다보니 책모임의 구성원들이 모두 공부에 뜻을 둔 사람들이라 그랬는지 모두 한마음으로 위로 받았다고 고백한 책의 한 대목이 있었다. 다산이 유배 중에 가르친 황상이라는 제자(일속산방이란 서재의 주인이다)가 자신은 둔하고, 박하고, 미욱하여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니 다산이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큰 문제점이 있는데, 네게는 이런 것이 없구나. 첫째는 외우기를 잘하는 것인데,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소홀히 하는 데 있다. 둘째는 글을 잘 짓는 것인데,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경박한 데 있다. 셋째는 이해력이 뛰어난 것인데,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거친 데 있다. 대개 둔하지만 악착같이 파고드는 사람은 그 구멍을 넓힐 수 있고, 막혀 있지만 소통이 된 사람은 그 흐름이 거침없어지며, 미욱하지만 연마를 잘한 사람은 그 빛이 반짝거리게 되는 것이다. 파고드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막힌 것은 어떻게 뚫어야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연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부지런해지느냐? 마음을 꽉 잡아야 하는 것이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는 구전 격언(?)만큼이나 그냥 믿고 싶은 대목이다. 세상 다른 일들도 공부하듯 ‘부지런’하면 ‘되는’ 일들이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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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 년 동안 진행된 포문도 토독회의 책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독서국민의 탄생>(나가미네 시게토시 저, 푸른역사, 2010)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니콜라스 카 저, 청림출판, 2015)

<생각은 죽지 않는다>(클라이브 톰슨 저, 알키, 2015)

<한국도서관사연구>(백린 저, 한국도서관협회, 1969)

<문화공간의 사회학- 국가, 공공영역 그리고 도서관>(김세훈 저, 한국학술정보, 2009)

 

그동안 우리의 관심사는 도서관과 책 읽는 시민에서 도서관의 역사, 다시 책의 역사와 그것의 사회적 의미로 초점이 이동되었다. 그리고 논의는 그 경계를 한국사회 속으로 설정하였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한국 사회 속에서의 도서관을 살피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책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조선의 책과 지식은 조선사회와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을까?>(강명관 저, 천년의 상상, 2014)이다. 이 책을 통해 책이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의 상황과 그 사회 속에서의 책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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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 조선의 책과 지식은 조선사회와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을까?-

 

박수희

 

이 책은 고려와 조선을 이어 진행된 책의 제작과 유통과정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모든 내용이 완벽하게 고증되었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한문학자이며 조선시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많은 저서를 낸 저자가 수많은 사료를 제시하며 당시의 상황을 면밀하게 전하고 있다. 전체내용은 책의 제작에 필요한 활자, 인쇄출판 기관, 책의 제작과정, 유통, 가격, 서점, 도서관, 책의 수입과 수출 등을 두루 다루고 있는데, 각 챕터별로 독립적으로 서술하여 읽기가 매우 쉽다.

 

오래 전, 도서인쇄 및 도서관사라는 학부과목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습득했던 내용을 이 책을 읽으면서 전혀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되었다. 활자와 책, 책과 도서관을 그저 지식이 축적된 물리적인 형태로 생각했던 것에서, 그것이 우리 사회의 변화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져 왔는 지를 곱씹어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몇 가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으니 서적도 그만큼 많이 제작되었겠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이후에는 한글로 된 책들이 주로 만들어졌겠지....”

금속활자 개발이 세계 최초이니, 그 이후 기술개발도 우리나라가 단연 앞서겠지...”

우리나라 서적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활자기술과 쉬운 글자인 한글 덕분이겠지...”

 

그러나 아쉽게도 현실은 크게 달랐다. 우리가 믿고 있던 세계최초의 활자, ‘직지나 세계적 문화유산, ‘한글이 국민의 지식충족을 위해 널리 사용되기에는 몇 가지 걸림돌이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가 활자제작과 책의 출판을 독점하였다.

둘째, 국가독점형 출판업은 서양의 경우와는 달리 그 기술적 진보가 매우 느렸다.

셋째, 알파벳과는 달리 한자는 활자제작이 매우 어렵고 복잡하였다.

넷째, 인쇄출판은 활자제작이나 종이에 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 민간에서 출판을 시도하기 어려웠다.

다섯째, 국내에는 책이 유통될 수 있는 서점이 없었다.

 

책의 출판을 국가와 종교기관에서 독점하였던 것은 서양과 우리나라 모두 크게 다르지 않았다. 권력의 보유와 지식의 소유를 동일 시 했던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였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은 이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 하지 않았고, 따라서 금속활자가 만들어진 후에도 이것이 바로 책의 대량생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국가통치를 위해, 종교적 수양을 위해 책을 제작하였을 뿐, 지식의 확산을 위한 시도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 시대로 오면서 상황이 변화되었다. 민간인이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고안한 것은 생산가격을 낮추어 인쇄물에 대한 민간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함이었다. , 상업적 목적으로 민간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 때 찍어낸 성서는 많은 이들이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를 통해 특권계급의 지식을 해체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결국 구텐베르크 성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서양의 역사에 거대한 전환점을 가져오게 한 장본인이 된 것이다.

 

상업적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기술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좀 더 빠른 인쇄를 위하여 구텐베르크는 포도주 압착기를 응용하여 반 기계화된 인쇄방법을 개발하였다. 1520년 당시에 한 번의 조판으로 3000부 가량의 책을 발행하였다. 또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을 습득한 기술자들이 유럽의 각지로 흩어져 이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인쇄술이 전파되었다. 민간이 보유한 기술이 상업적 추진력과 맞물려 엄청난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반면, 국가의 필요에 의해 금속활자를 개발한 우리나라의 경우, 인쇄출판은 여전히 국가의 독점기술이었다. 우리의 금속활자는 대량인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활자는 조판이 복잡하므로 인쇄물의 대량생산은 오히려 목판이 더 유리하였다. 금속활자는 새로운 수요에 신속하게 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채택된 것이었다.

 

경쟁이 없는 독점기술은 그 발전 속도 또한 상당히 더뎠다. 당시 우리의 금속활자는 조판 틀에 밀랍을 부어 놓고 밀랍 위에 활자를 일일이 꽂아 넣어야 하는 것으로서 상당한 인력이 소요되는 수공업 방식이었다. 하루에 40장 정도를 인쇄할 수 있었으며, 하나의 책이 조판되어도 수 십에서 수 백부 정도만 인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만일 조선에서 인쇄출판 권한을 민간에 허용했다면 더욱 효율적이고 경제성 있는 인쇄기술이 발달했을까?

 

그러나 국가 독점이 아니었다하더라도 문제는 남아있다. 그것은 라틴어와 한자로 대별되는 문자의 문제이다. 라틴 자모는 26개의 활자를 반복적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제작이 수월하며, 글자의 획수가 간단해서 주조하기 쉽고, 조판도 수월하다. 반면 한자는 필요한 글자가 수 천, 혹은 수 만자에 달하므로 주조할 때마다 적게는 10만자에서 많게는 30만자까지 제작해야했다. 또한 글자의 모양도 매우 복잡하므로 제작하기가 쉽지 않으며, 제작된 활자를 조판하는 작업조차도 수월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작업은 수많은 비용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민간에서 감당하기가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또한 활자의 제작을 위한 재료가 매우 고가였고, 서적을 찍어낼 종이 또한 상상이상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민간에서 수 만자의 활자를 제작하거나 찍어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움직일 수 있는 국가에서만 수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언어가 한자인 것이 문제였다면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이후에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유감스럽게도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글만으로 작성된 책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글은 번역본으로만 사용되었다. 한글은 한자로 쓰인 책을 이해할 수 있도록 언해본으로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책을 쉽게 번역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당시 국가는 주자소와 교서관이라는 기관을 통해 인쇄와 출판을 독점했고, 당대의 지식전달과 확산의 유일한 매체였던 책은 국가의 체제유지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국가가 발행하는 책을 통해 사대부는 지배계급으로서의 교양과 이데올로기를 갖추었고 이것이 조선체제를 장구하게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서적의 유통도 관의 주도에 따라 이뤄져서 중앙의 고급관료와 종친 또는 지방관청에만 무상으로 분배되었으며, 일반 독서인구의 수요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었다.

 

금속활자의 사용으로 조선시대 인쇄물 종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활자를 국가가 소유했기에 지배층이 지식을 공급하고 유통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책을 찍을 것인지를 결정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체제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던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지식독점을 해체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동안, 조선의 금속활자는 중세의 질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책의 유통을 위해서는 서점이 마련되어야하는 데 이 또한 추진이 어려웠다. 일부는 책을 상품으로 파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만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적의 가격 자체가 매우 고가였으며, 공급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행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점설치에 대해 시행세칙이 마련되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19세이 이전의 서점은 흔적은 확인하기 어렵다. 새로운 서적의 유통구조가 필요했으나 이를 타개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서적인쇄를 국가가 독점한 것이 민간 인쇄출판업의 발달을 막았고, 서적 공급량을 확대하는 데도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는 좀 달랐다. 중국은 송, , 청대에 이르는 서적상과 서점가 발달이 있었고, 일본도 1620년대에도 서점, 출판업자가 경도에만 14곳이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활자가 진작부터 발전한 우리나라만 삼국 중에 유일하게 서점이 없었던 것이다.

 

서점이 없었다면 도서관은 존재했을까?

 

우리나라는 고려 때부터 서적의 인쇄와 수장에 열심이어서 중국으로부터 책을 다수 수입하는 노력을 보였다. 오히려 중국에 없는 이본이 고려에 많이 소장되어있어, 중국이 고려에 책을 요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이렇든 각고의 노력을 했던 고려의 국가장서는 여러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조선의 홍문관은 온 나라의 책을 거두어 총목을 작성하고, 모든 책의 수정, 관리, 보관 등을 담당했으며, 임금의 자문에 응하며, 임금의 잘못을 비판할 수도 있었다. 국가가 발행한 모든 서적을 반드시 경복궁 근정전의 융문루와 융무루에 간직하도록 했다. 국가 발행 서적 뿐 아니라 필요한 도서 목록을 적어 중국의 서점에서 구입하거나 중국에 하사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개인이 소장한 책을 국가에 바치도록 권장하며 이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서적 수집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당시의 도서관은 궁중에 소재하였으며, 궁중 출입이 허락된 관료들만 접근할 수 있었다. 왕의 경연에 필요한 도서를 요청할 경우에도 환관이 특별한 표신을 제시해야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관료들 역시 도서관 출입이 무제한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서적이 곧 사회와 문화를 만든다.”

 

저자는 서적이 곧 사회와 문화를 만든다.“고 하면서 책과 지식의 의미를 되새겼다. 우리나라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국가가 인쇄출판을 독점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권력자의 체제유지가 아니라 더 많은 지식을 국민에게 보급하기 위한 용도로 되었다면 우리의 사회는 조금 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에 우리는 일본의 끊임없는 요구에 의해 대장경을 하사하곤 하였으며 인쇄출판 문화로 동아시아의 또 다른 중심이 될 정도로 지적사회기반의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특정 계층에 독점되었던 서적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일부에게만 열려있던 지식이었기에 안전한 보존이 더욱 힘들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의 수많은 서적, 그리고 활자까지 약탈해 간 일본은 그것을 자국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지식이 새로운 사회변화의 근간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서적이 사회와 문화를 만든다. 서적이 전달하는 지식이 사람들을 깨운다. 새로 깨어난 사람들이 또 다른 생각을 만든다. 그 예로, 조선시대에 천주교 서적의 수입은 자생적 천주교 신자를 출현하게 했다. 구텐베르크의 성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종교개혁을 낳았다.

 

조선시대 지식은 이 책에서 설명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활자를 개발하고, 문자를 만들고, 여러 서적을 입수하는 노력을 부단하게 추진한 것은 우리 선조들이 이미 지식보유가 국가 발전의 근간임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당시 권력층이 지식에 대한 보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체제유지 우선이라는 견고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우리의 인쇄출판, 지적접근, 서점, 도서관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동안 그저 우리의 직업으로서 출판, 서적상, 도서관의 활동과 성과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것에서 잠시 한 발짝 물러나 이 사회에서 지식에 접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지, 그것을 위해 우리가 앞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할 지를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은 토독회가 그동안 진행해 온 흐름, 즉 독서-생각-도서관의 역사-도서관과 현 사회라는 맥락과도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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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다음 토독회(311일 금요일)에서는 <서재에 살다: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이야기>(박철상 저, 문학동네, 2014)를 통해 조선시대의 지식인 개인의 책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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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사)포럼 문화와도서관 <열혈 사서들의 수다>에 초대합니다.


한때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속에 우후죽순 전자도서관이 만들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자책 확산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면서 전자도서관도 애초 기대만큼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열혈 사서들의 수다>에서 는 전자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변화하는 환경속에서 전자도서관의 역할을 가늠해보고 향후 전자도서관의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의견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도서관의 미래를 고민하는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행사개요 □


0 주제 : 전자도서관은 도서관의 미래인가?
0 강사 : 인천광역시 도서관발전진흥원 손명희 주임
         "책읽기 편한 도시 인천-스마트도서관 모바일 서비스 사례"
0 일시 : 2016.2.26(금) 19시 ~ 21시
0 장소 : 인천수봉도서관 3층 배움누리2

            (인천광역시 남구 경인로 218)

○ 주  관 : (사)포럼 문화와 도서관
○ 참가자 : 주제에 관심있는 누구나(30명 이내)
○ 참가신청: clf10suda@gmail.com
○ 참가비 : 5,000원(참석 당일 현장 납부)
 

< 찾아오시는 길>

인천수봉도서관 http://www.slib.or.kr/about_lib/location.asp


1호선 도화역 2번출구, 도보로 10분소요 예상

 

**[포럼 문화와 도서관]은 도서관을 둘러싼 제반 환경과 제도, 현안 사항들에 대한 연구와 토의를 통해 의견을 제시하고, 여론을 조성하며, 궁극적으로 도서관 및 도서관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발족된 기관으로 연령, 소속기관, 지역,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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